내가 처음 용돈이라는 걸 받은 게 말야,
1995년..그러니까 국민학교 2학년 때였어.
얼마였냐면, 하루에 300원이었어.
그 300원으로 내가 했던 건 말야
정문에 내려주신 아버지의 차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근처 문방구로 쪼르르 달려가서 100원짜리 뽑기 기계를 돌리는 거였어.
그게 뭐라고 나도 참나, 매일 아침마다 그렇게 돌려댔는지.
100원짜리를 쑤셔넣고 레버를 끼릭, 끼릭 하고 돌렸지.
이게 또 한 번에 다 안 돌아가, 반쯤 돌리고 다시 잡고 더 돌려야 해.
그러면 안쪽에 장난감 볼들이 한 번 우쿠쿵 하더니 지들끼리 몸을 밀쳐댄단 말야.
아, 이제야 생각해보니 그 모습이 제법 익숙해.
매일 아침 지하철을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쏟아져 나오더라, 그래 맞아 딱 그 꼴이야.
그렇게 100원이 돈통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나면
그 소리와 교체된 내 장난감 볼이 나오는 거지.
반은 투명하고 반은 불투명하고.
어린아이의 손아귀 힘으로는 그거, 열기가 꽤나 힘들어.
“이익” 하고 입 앙다물고 힘을 주는데도 어떤 건 쉽게 열리는데 어떤 건 또 안 그래.
그럴때면 문방구 아줌마의 눈치를 슥 보고는 볼을 바닥에 놓고 발로 쾅, 밟아버리지.
아, 물론 안에 있는 내용물이 부서지지 않게 적당한 힘으로 말야.
그렇게 깨진 볼 사이로 장난감이든 반지든 젤리든 고리든 뭐든 그 모습을 드러내지.
사실 그게 뭔지는 중요치 않아. 그저 내가 뽑았다는 게 중요할 뿐이지.
하루 용돈의 3분지 1을 넣고 돌려서 얻은 내 것, 그게 중요한 거지.
자 이제 내용물을 챙겼으니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야 되.
밟아서 부서진 장난감 볼을 청소하느 건 문방구 아주머니가 꽤나 싫어하는 일이거든.
깨진 플라스틱 조각들을 치우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는
집에서 유리컵 하나 정도 깨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거야.
그렇게 100원이 쓰였지, 매일.
그러고 남은 200원은 늘 간식값이었어.
나는 학교 입학 전에 유치원을 가지 않고 태권도 학원을 다녔어.
왜 태권도 학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학교 1학년일때 이미 빨간 띠를 매고 있었지.
태극 8장까지 마스터한 국민학교 1학년이라니, 멋지지 않아?
게다가 1단을 국민학교 2학년때 땄다고. 무려 9살, 나이가 한 자릿수일때.
응, 스무살 넘어 군입대한 애들이 일과 외 시간에 투덜대면서 따야하는 그거.
국민학교 2학년은 4교시까지만 하고 하교를 하지.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는 해가 남에 떠서 북을 따시킨다는 12시쯤말야.
뭐, 요즘에야 학원이다 과외다 뭐다 애들을 엄청 굴리던데
내가 어릴 적엔 딱히 그런 모습이 흔하지도 않았고,
조금 더 솔직하게는그렇게 이리저리 여러 학원을 다닐 정도로 가세가 좋은 것도 아니었어.
가세가 좋았으면 용돈이 겨우 300원이었겠냐, 하다 못 해 천원이라도 줬겠지.
그렇다고해서 용돈에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야. 받는 걸로도 감사했으니까.
그 어린 내가 봐도 우리 부모님은 정말 고생을 하셨거든.
스무살도 채 되지 않아서 시작하신 공장일은 몸을 혹사시키는 3교대였고
내 집 하나 없이 공장 한 켠의 셋방살이를 전전해야 했으며
하루 12시간이 넘는 일과 늘 기름때를 벅벅 씻어야하는 상처가득한 손.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시켜먹으면 행복했었지.
가끔 피자를 먹으면 말도 안 되는 행복이었고.
어릴 때는 그걸 계산하는 부모님의 손떨림을 미처 못 봤지.
그게 손이 떨리는 게 아니라, 마음이 떨리는 거라는 걸.
하나 밖에 없는 아들한테, 겨우 한 달에 한끼 맛있는 거 사먹이는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가셨을지.
이야기가 조금 새버렸네.
점심 남짓한 시간에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가야했어.
학원에선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의 퇴근 시간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었어.
태권도 수업 1시간을 듣고 나머지 시간은 학원 사무실에서 숙제를 하거나
자유대련이나 구기종목을 하는 수요일이면 한 타임을 더 듣곤 했지.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학원에서 보내야하다보니 간식은 필수였지.
한창 먹을 나이라는 건 평생의 모든 순간이 그러하지만
세포가 활발해서 성장해야 하는 9살의 아이에겐,
먹는다 라는 건 일종의 생존공식이라고.
심지어 매일 격한 태권도 수업도 듣는데 그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
그나마 다행으로 꼽는 점 중에 하나는 태권도 학원이 국민학교 바로 옆이었다는 거야.
학교 담장을 넘어서 차 하나가 다닐 법한 도로를 총총대며 건너면 학원 정문이었어.
당시만 해도 학원들이 지금처럼 삐까번쩍한 건 건물의 고층에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원룸촌 같은 건물에 간판도 없이 유리창에 테이프인지 뭔지 모를 것들로
‘태권도 학원’, ‘피아노 학원’등의 글자를 만들어서 아, 저기가 학원이구나 알게했지.
내가 다니던 태권도 학원은 그거보다 더 했는데,
이게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공장이야.
왜, 공장에 가면 그런 문들 있잖아.
밖에서 보면 되게 두껍고 튼튼해 보이는데 중간에 잠금쇠가 있고
그걸 풀고 문을 열면 문짝 평면 그대로 안으로 접히는, 말 그대로 대문의 형태.
그런 와중에도 한 쪽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달린 공장 대문.
그 문이 늘 나를 반겨줬어. 초입부터 그런 비쥬얼인데 여길 대체 누가 태권도 학원이라고 보겠어?
그나마 그 철제 대문 위에 ‘청훈 태권도’라고 적혀 있어서 다행이지,
매일 거길 드다드는 조그마한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봐.
아이들 특유의 밝음과 쾌활함을 가지고 들어간 아이들이
태권도 수업을 하고 나면 다들 지쳐서 퀭하게 나온단 말야.
언뜻 보면 완전 앵벌이 소굴이지.
오늘은 얼마 벌어왔어? 껌 좀 팔았어? 그런 상상을 했다고 해도 납득해줄 수 있는 비쥬얼이란 거지.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공장같은 게 아니라 공장이었을거야 분명.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우측켠엔 창고쓰이던 곳이 있었어.
구르기를 연습하던 매트나 발차기로 너덜해지던 받때기가 거기서 늘 나왔거든.
그리고 좌측엔 중간중간 노란 솜이 터져나온 쇼파가 놓인 사무실이 있었고
정면엔 불투명 유리창으로 이뤄진 미닫이 문이 있었어. 그 문을 열면 태권도장이었지.
정말 개미 눈꼽만큼 푹신한 녹색 매트가 깔려있고 한 쪽 벽은 전면유리로 가득찬 도장.
뒤쪽엔 저녁반 어른들이나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도 있었지.
“예의, 인내, 백절불굴”을 늘 크게 외치며 태권도 수업은 시작을 했었어.
지금 생각해보니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랑 비슷했던 느낌이야.
다만 어릴때는 좀 더 멋있었던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후자는 되게 멋없고 이딴 걸 왜 시키냐, 내 목청 나간다 같은 불평불만적인 느낌이라는게 차이랄까.
그렇게 1시간동안의 태권도 수업을 하려면 배를 넉넉히 채워둬야 했어.
채워놓지 못 한 날은 후불제로 채워야했지.
무려 200원어치의 후불로.
200원으로 지금할 수 있는게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잠시 고민을 해봐야 할 거 같아.
글을 쓰는 지금도 책상을 슥 둘러봤는데 어느 것 하나 200원으로 살 수 있는 게 없어.
어젯 저녁에 먹은 맥주 한 캔도, 읽은 책 한 권도, 조금 전에 졸려서 마신 커피 한 캔도 못 사고
연필통에 가득 꽂힌 볼펜들 중에 어느 하나도 살 수 있는 게 없지.
포스트잇이나 A4용지를 낱장으로 판다면, 그래 한 4~5장 정도는 구매가 가능하겠다.
하지만 당시에는 말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 한 접시가 200원이었다고.
당시엔 컵볶이라는 것도 없었어. 자판기에서 뽑아 먹는 커피 한 잔 정도 사이즈의 종이컵에
떡볶이를 넣어서 판다고? 그걸 누구 코에 붙이고 누가 양심없이 그딴 양을 팔아먹어, 인심없게?
걸어가고 있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어느 집 자식이누, 아이고 귀엽다 하면서 손에 알사탕 쥐어주는게 예사인데
한 손보다 작은 종이컵에 떡볶이를 담아, 그거 뭐 떡 몇개나 들어간다고?
대여섯번 푹 냠 푹 냠 해버리면 사라질텐데 그걸 조막막한 손을 가진 코묻은 애들 돈 받고 팔다니.
집 근처 봉봉(트램펄린)을 15분 동안 즐기고 달달한 설탕차를 마셔도 300원을 내던 때니까말야.
녹색바탕에 흰 점박이 무늬가 찍힌 플라스틱 접시에 빛깔 좋은 떡볶이가 늘 담겨나왔지.
학원 바로 옆에 붙어있는 문방구였는데, 문방구치고는 물품이 적었어.
암만 생각해도 그 집의 주력상품은 연필,스케치북,크레파스 같은 게 아니라 그 떡볶이였던 거 같아.
주 고객층이 애들이다보니 매운 맛 보단 단 맛에 집중한 맛이었지.
생각해보면 먹어본 지 20년이 넘었는데, 난 그 떡볶이만큼 맛있는 떡볶이는 못 먹어본 거 같아.
물론 매운 맛이나 단 맛이나 맛의 다양성과 취향의 존중성으로 인해 절대레벨로 채점이 불가하지만
내 기준을 토대로 채점을 해보자면 서른 둘의 시간속에서 가장 맛있었던 떡볶이는 그 떡볶이였어.
떡은 푹 삶은 듯 딱딱하지 않고 말랑했던 덕에 포크로 푹 찔러도 저항감 없이 들어올릴 수 있었지.
그렇게 들어올리면 붉지않고 투명한 떡볶이가 들리는 거야.
특이하지? 떡볶이가 새빨갛지가 않았어. 간장떡볶이나 짜장처럼 검지도 않았지.
위에서도 말 했듯이 매운 맛보단 단 맛이 강한 떡볶이였어.
다만 그 사이사이로 고춧가루들이 있어서 매콤한 맛을 좀 더 가미해줬달까.
지금 생각해보니 조청의 끈적하고 달달한 맛이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문방구 아주머니의 비법요리인데 내가 그것까지 알리가 없잖아?
내가 그때 알았던 건 200원으로도 충분히 이렇게 맛있는 떡볶이를 먹을 수 있구나 라는 거였어.
뭐, 그렇다고 늘 그렇게 떡볶이만 먹었던 건 아녔어.
학교 뒷문에 있던 구멍가게에선 꽁꽁얼린 콜라맛 아이스크림이 한 개에 100원이었거든.
해가 눈이 부신 여름날엔 아이스크림도 곧잘 사먹었지.
그러고 100원이 남으면 학원에서 친구를 꼬시곤 했지.
“나 100원 있는데 합쳐서 떡볶이 먹지 않을래?”
300원으로 누릴 수 있는게 참 많았던 거 같아.
며칠이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뽑기도 100원이었고
배고픔을 달래주던 떡볶이는 200원이었지
더위를 식혀주던 아이스크림은 100원이고 말야.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데도 100원이면 충분했지.
그랬었던, 300원인데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