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현 상병님. 이구현 상병님?”
땅 속 깊이 꺼져있던 의식이 되살아난 좀비처럼 두 팔을 척 꺼내고는 몸을 떨며 뛰쳐나왔다. 반쯤 뜬 눈으로 알람의 진원지를 찾자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형이 보인다.
“근무 나가셔야 합니다.”
상체를 일으켜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침번, 신현찬 일병이 말한다. 오른손을 힘없이 들어 귀찮다는 듯 내젖자 현찬이 알았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활관을 나간다.
“후우….”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한숨이 나온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설이 인내심의 한도를 넘어선 듯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군생활 1년 3개월. 어지간히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서 경계근무를 나가야 하는 일 따위는.
한번의 짜증을 더 내쉬고는 몸을 일으킨다. 입고있던 활동복을 발 언저리에 대충 벗어놓고는 관물대에 걸린 전투복을 꺼낸다. 상의를 집어 오른팔을 끼운 채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엎드려 자는 후임, 서로 껴운고 자는 동기, 매트리스따윈 일찍이 작별을 고하고 바닥에 드러누운 선임까지. 모두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달나라로 떠나는 특등석에 타고 있다. 난 오늘 3등석이라 이 꼴이지만.
-여러분이 고생해서 옆의 전우가, 가족이 오늘 밤을 편히 보낼 수 있다는 걸 유의하도록.
문득 오늘 있었던 당직사령의 일장연설이 떠오른다. 내 희생으로 베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마냥 가지각색으로 뒹구는 이놈들이 편히 자는 건가. 순간, 무언가 억울한 기분에 울컥해버린다. 허리띠를 조이고 옆자리에서 곤히 자는 정겨운병장의 베개를 슥 빼서 바닥에 툭 떨어트려 버린다. 습도유지를 위해 바닥에 뿌려진 물이 게임 속 슬라임처럼 스믈거리며 베개속으로 스며든다. 평소 정병장의 작태에 대한 소심한 복수의 마무리는 그 베개를 다시 정병장의 품에 두는 것이다. 두면 자기가 알아서 베갰지.
취침전에 윤이 나게 닦아놓은 전투화에 발을 넣고 끈을 조인다. 발목을 꽉 조여오는 전투화끈을 느끼며 다시한번 한숨을 내쉰다. 미리 꺼내놓은 X-반도를 둘러매고 방탄을 옆구리에 낀 채 생활관을 나섰다. 랜턴으로 게시판을 비추며 게시글을 읽던 현찬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돌아본다.
“정윤이는?”
“곧 나올 겁…아, 저기 옵니다.”
오늘 야간경계근무의 부사수인, 나와 함께 이 새벽의 미명을 맞이하여 일출관람권을 취득한 장정윤일병이 느긋이 생활관을 나오다 먼저 나온 나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뛰어오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반쯤 열린 당직실의 문을 열고는 간단한 신고와 함께 들어섰다. 너구리처럼 다크서클이 진하게 보이는 당직사관과 당직병 유세환병장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를 보고는 총기함 열쇠를 꺼내 내밀었다. 정윤이 서둘러 키를 받아 총기함을 여는 동안 난 총판에 나가야하는 총들의 열외사유를 적었다. 총기함에 놓여진 짙은 먹색 K-2가 자신의 단잠을 꺠우러 온 나를 보며 신경질을 부리는 듯 하다.
어쩌겠지, 니 주인도 나가는데 너도 가야지.
나와 세환병장, 정윤은 각각 총을 꺼낸 뒤 멜빵끈을 조절해 오른쪽 어깨에 걸어맸다. 5Kg인가 7Kg인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총이라는거, 사람의 목숨치고는 가볍다.
사관에게 간단한 투입신고 후 세환병장을 따라 지휘통제실에 들러 탄이 들어있는 탄창을 받은 후 막사현관에 도달했다. 세환병장이 건네주는 열댓명의 목숨 중 하나를 장전하고는 행여나 오발이라도 날까싶어 총을 꾹 쥐었다.
“에휴.”
짧게 한숨을 내쉬자 나란히 걷던 세환병장이 의아한 듯 쳐다본다. 벌써 몇번째 한숨인지.
잠을 깬 순간부터 치밀어오르던 짜증은 체념으로 바뀌어가고 어둠속을 응시하는 두눈에는 의지와는 달리 졸음이 모래시계처럼 쌓여간다. 하늘은 여전히 진남색이고 어느덧 많이 진, 계란 노른자처럼 샛노란 달남이 날 보며 씩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새벽, 그리고 그 평화를 위한 나의 새벽.
다시 한번 숨을 내 밷으며 마음을 다 잡아본다.
-여러분이 고생해서 옆의 전우가, 가족이 오늘 밤을 편히 보낼 수 있다는 걸 유의하도록.
다시 한번 당직사령의 일장연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역시…그런 형식상의 지리한 말 몇마디보다는…
“군인이니까, 나는.”
“잘 못들었습니다?”
정윤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줄 알고 반문한다. 잠시 정윤을 쳐다보지만 사위가 어두운지라 세세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알 것 같다. 정윤의 눈에도 눈꿉이 무더기로 달려있을 것이란 걸.
“너, 군인이지?”
“예, 그렇습니다.”
“응, 나도 군인이야.”
여전히 세환병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오늘은 언제쯤 미명이 찾아올까, 어느 군바리의 이 새벽에.
이 글은 군인이던 시절, 병영문학상 수필부문 응모작 중 하나입니다.
취침시간에 당직사관 몰래 모포 뒤집어쓰고 후레시로 비춰가면서 썼던 기억이 나네요.
9년 지나 다시 읽어보니 새삼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