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지 못 한 꿈 이야기

꿈에서 너를 만난 것도 아닌데
나는 혼나야만 했다, 너와 나의 지인에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삐약이지조차 못 했고
내가 한 모든 행동들이 잘 못이였음을 되새겨야했다.
첫 모금은 달았는데 기점을 넘기자 쓴 맛이 자욱한
어제 저녁의 소주 한 잔 처럼.
그 탓인지 바라던 꿈에서 만나기는 커녕
독한 술을 삼킨 듯 속이 타들어가고 쑤셔오는 감각에
미안하다,그 말만 되풀이해야했다.

비난의 시선도 동정의 시선도 위로의 시선도.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그 이상의 어느 시선도.
전부 감내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첫 잔만큼 달지가 않다.

오히려 털어버린 마지막 잔만큼이나 써서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아니,가시질 않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잊지 못 한다는 표현이 적절한 거겠지.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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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끄고, 앉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오늘의 글을 쓰기 위해서.
오늘은 무엇을 쓸까.
어떤 글을 쓸까, 잠시 고민을 한다.

스마트폰의 메모앱을 열면, 틈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해 놓은 편린들이 가득하다.
그것들 중에 하나를 복기하며 쓸까싶어 열어보지만, 아닌 거 같다.
그때의 감정이 일어나질 않는다, 동조가 되질 않는다, 공감이 되질 않는다.

내 글은 언제나 어린아이의 붓글씨같다.
가닥없이 이리튀고 저리튀어있다.
언제는 오른쪽인데 언제는 왼쪽이라하고 언제는 위로도 아래로도 팔방으로도 향해있다.
중심이 없고 주체가 없는 글이 태반이며 핀을 꽂듯이 고정되어있지 읺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한 글이고 나쁘게 말하면 두서없는 글이다.
기승전결같은 건 고전문학에서나 찾으라지, 할 법할 정도로 차반이다.
차반 중에서도 제일 똥 같은 거, 응 그래 그거. 개차반.

나는 정신병자다.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겠지만 한 때 글을 쓰던 닉네임이 마인드 언컨트롤러였던 적도 있다.
정신을 내가 제어를 못 해서 마인드 언컨트롤러.
쉬이 말하자면 그냥 미친놈.
남들이 이해 못 하는 사고를 하는 놈.
그리고 그 사고를 바탕으로 이색한 놈.
하는 행동의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들에게 왜, 라는 질문을 받아야하고
질문의 대답이 결국은 그냥, 이 되어버리는 녀석.
그냥이 정말 그냥인 녀석. 논리와 합리적인 이유 없이 모든 대답에 대한 사유가 나라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녀석.

그럴때마다, 말해주고 싶은 말은
상이하다고 해서 이상한 건 아니라는 대답이지만.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전과 다르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현상이든 무엇이든 배척하는 눈길로 보며 질문을 던지다.
당연히 그 질문에는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
질문을 받는 당사자의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 그 질문은 왜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이상이라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그랬고 그랬으며 그러할 거란 생각이 든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웃어 넘겼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고를 가진 거 같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다.
남은 나와는 다른 사고를 가진 거 같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다.
남들은 나를 다르다고 생각지 않는다.
남들은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나를 넣어두는 카테고리가 흔히 말하는 정상이라는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그 놈의 정상이 대체 무엇인지, 멱살을 잡고 따질 정도로 내 배알은 크지 않았다.

과거에는 말이다.

지금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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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이라는 거

선택은 있어도 정답은 없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정답인지 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정답일까.

정답의 정은 바른 정자다.
5획으로 그어지는 한자.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정답은 ‘옳은 답’이라고 알려준다.

각자의 삶이 옳지 않았던 이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도덕적, 윤리적, 인륜적 패악질을 부린 이라도
행할 때는 본인이 옳았을 텐데.

결국은 죽을 때가 되어서 깨닫는다는 정답은
정의할 수 없는 삶을 가늠하는 잣대로써
필요에 의해 소환된 도구적 언어일 뿐이다.

삶의 정답은 없다.
그럼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알게 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게 정답이라는 말로는 판정내릴 수 없는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결정되는 건,
Birth와 Death 사이에 Choice가 있듯이
살아 온 삶의 모든 순간에 해야했던 선택.
그리고 그 순간을 선택했던 결정에 대한 정답, 혹은 오답이 아니라
결국은 나의 기준으로 나는 만족하는 가이다.
그리고 그 만족의 기준은 당연하게도 누구나 다르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도 다르다.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만족하는가.
200? 300? 천? 억?
나는 S기업에서 인턴을 하던 시절
100을 조금 넘는 월급을 받았다.
그래도 만족했다.
먹고픈 걸 먹고 동기들과 놀고 후배들 밥도 사주고
다음 학기 등록금에 절반을 내가 번 돈으로 충당했다.

월 100쯤에 만족한 삶을 살았다.
다른 회사에 취업해서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월 100 남짓이라니, 이번 달 카드값도 못 채우겠다.
그 돈을 받고 일을 하라? 불만족이다.

아니, 그 전에 만족의 여건이 돈이어야 한다는 전제부터 수정해야 한다.
사람마다 가지는 가치는 돈의 액수만큼 다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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